나는 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. 주변에선 내 장점이라고 말해주기도 한다. 사물이 겉보기와 실제로 어떻게 다른지, 내면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을 즐긴다. 본질에 관한 탐구라고 할수도 있겠다.
이 본질을 대하는 자세는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첫 팀에서 배웠다. ‘이 제품은 왜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가,’ ‘이 사업은 왜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가.’ 모든 업무는 ‘이해’하는 데서 출발한다. 그것이 제품이든, 고객이든 시장이든 동일하다. 그런 면에서 리서치는 모든 일의 기본이다. 단, 언제나 중요한 질문에 집중하며 내 생각을 가미해야 한다. 그렇게 본질에 초점을 맞추고, 이면에 있는 것들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. 그래서 모든 고민에는 본질에 관한 고민이 있고, 본질에서 벗어난 고민이 있다.
최근에는 이 ‘본질’에도 저마다의 깊이에 따른 층위가 있다는 걸 배웠다.
많은 스타트업들이 ‘빠르게’를 강조한다. 하지만 개인의 입장에선 속도보다 더 어렵고 중요한 일이 있다고 느꼈다. 상황과 맥락에 맞는 본질을 꿰뚫는 일이 그렇다.
지금 팀은 10 to 100을 만드는 스테이지에 있다. 한 번 돈이 순환하는 궤도에 있는 사업은 전혀 다른 역량을 요구한다. 이 단계에서는 적절한 층위의 본질을 찌를 수 있어야 한다. 마주한 문제의 펀더멘탈(fundamental)을 파악하더라도 바로 파고들 수 없다. 여러가지 현실적인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.
그래서 단계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요구된다.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게끔 해결하고, 병목인 것이 병목이 되지 않게끔 만든 뒤 다른 문제로 넘어간다. 그렇게 동작하는 제품의 각 기능을 지속적으로 번갈아 가며 손본다. 아마 이러한 반복을 여러차례 거치다가 적절한 시기에 펀더멘탈에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. 그럼 이러한 판단이 필요한 타이밍을 읽어내는 것 또한 어떤 초감각적인 영역이지 않을까. 지금의 나는 이 단계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.
같은 문제도 각 조직이 어떤 상황과 단계에 있는지에 따라 문제의 본질은 달라질 수 있다. 마치 시의적절한 전략과 접근법이 있는 셈이다. 그러나 늘 기억해야 한다. 잘 하는게 먼저고, 그 다음에 빠르게 할 생각을 해야 한다. 언제나 효율보다 효과가 우선이다.
마치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일 같다. 흰 도화지 위에 누구나 자신만의 위대한 그림을 구상할 수는 있다. 하지만 아무나 이를 그려내지는 못한다. 실력 때문인 경우도 있지만, 재료가 충분하지 않거나 종이의 크기가 충분하지 않거나 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. 반면 고수는 어떤 색의 물감을 갖고 있고, 어떤 제약이 얼만큼 있는지를 먼저 본다. 그 뒤에 최선의 그림을 구상한다.
현실에 타협해야 한다. 매 상황과 맥락에 맞는 전략을 구상하고 실행해야 한다.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이해하고, 현재에 맞는 접근을 하는 것도 실력의 영역이란 것을 새삼 느꼈다. 모든 게 시행착오다. 사업 참 어렵다.